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야마 우콘 (문단 편집) == 시복시성 == 일본 가톨릭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객사한 그를 순교자로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다. 일본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1867년 시복된 '205 순교자'이외에 '베드로 키베[* 일본 출신의 [[예수회]] 소속 가톨릭 신부. 최초의 일본인 신부이기도 하다. 1587년 지금의 [[오이타현]]에서 태어났다. 아버지는 다이묘였던 [[오토모 소린]]의 중신이었으나 키리시탄 추방령이 선포되자, 가족을 이끌고 [[마카오]]로 떠났다. 키베는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유학을 하였으며, 일본인 최초로 [[예루살렘]]을 방문하기도 하였다. 그래서 일본의 [[마르코 폴로]]라고도 불린다. 1620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으며, 인도에서 사목을 하다가 일본의 천주교 박해가 매우 심하다는 전갈을 받고 선교를 위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1630년 일본에 돌아온다. 9년간 박해의 눈을 피해서 선교활동에 전념하다가 [[센다이]]에서 체포되어 [[에도]]에서 순교한다. 2008년 187위 순교자와 함께 시복되었다.]와 187순교자'라는 이름으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는데(2008년 시복), 그는 '순교자 다카야마 우콘'라는 이름으로 단독으로 시복시성이 추진되었다. 그만큼 일본 가톨릭에서 다카야마 우콘은 위대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. [[2017년]] [[2월 10일]], 일본 [[오사카 성]] 홀에서 [[프란치스코 교황]]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[[추기경]]이 그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여[[http://www.cpbc.co.kr/onmedia/programe.php?cid=671243&wr_id=&code=7350|기사]] [[복자]]로 시복되었다. 축일은 [[2월 3일]]이다. 다카야마 우콘이 20여년간 종군했던 [[마에다 토시이에]]의 본거지, [[가나자와시|가나자와]]성의 바로 근처에 천주교 나고야교구 가나자와 예수성심성당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동상 및 초상화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행적과 관련 있는 곳을 순례지로 만들기도 하였다. 또한 시복 이후인 2017년 10월, 복자 다카야마 우콘의 성유물[* 그가 생전에 입었던 조끼의 일부]이 가나자와 성당에 안치되어 많은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. 천주교 오사카대교구의 [[주교좌성당]]인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[[가라샤]]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다{[[https://m.blog.naver.com/PostView.nhn?blogId=naraeng240&logNo=50161266703&proxyReferer=https%3A%2F%2Fwww.google.com%2F|출처]])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